깨진 항아리에서 피같은 물이 새요 나는 그게 싫어서 눈을 감죠 갈라진 틈으로 걸쭉한 피알이 새어나가 당신들 흰 소매와 바짓단을 적시고 나는 그게 싫어서 허상을 채웠어요 두터운 항아리 속에 가끔은 너의 얇은 유리상자를 시샘하고 투명한 벽을 추악으로 더렵혔지만 아무리 닦아도 항아리는 탁하고 두꺼워서 못같은 혀로 새로운 구멍을 뚫어요 기름때처럼 벽면에 들러붙은 ...
사람들은 제가 벌레만도 못하다고 합니다 존재가 무쓸모한 밥만 축내는 식충이라고 저는 그 말이 맞다고 생각했어요 벌레는 세상에 이로운데 나는 세상 굴러가는 톱니바퀴에 보탬도 없으니 그 사이에 끼어죽는 날파리의 날개가 아닐까 퍼득 퍼득 몸부림치는 날개의 그물선을 유영하고 버러지의 식감을 혀로 싹싹 핥아먹고 장판떼기에 눌러붙은 먼지와 몸을 섞고 그렇게 태어난 진...
간만에 들른 인적드문 서점 시집 코너에 발붙여 눈동냥을 하면 내 이야기는 없다 세상 걱정이 태반이고 절반은 그네들 이야기뿐 문학이 예술이 그런 거라고 하지만 가난한 시의 자괴감이 외로운 시의 통찰력이 그곳에 있었으면 했다 전쟁과 굶주림 자연과 휴머니티 고발과 고발과 고발 온통 뜬구름 잡는 이야기다 마음 하나 의탁할 곳 없는 집으로 돌아와 투정섞인 시를 쓴다...
나는 내가 망가졌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트라우마같은 건 어디에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런 건 나보다 훨씬 불행한 자들의 특권같은 거라고. 나같은 어정쩡한 절망에는 어떤 이름도 붙여지지 않아서, 남들처럼 멀쩡한 척 살아갈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이 있었다. 어렸을 때는 그게 당연한 건줄로만 알았다. 남들처럼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가서 서너명의 친구를 사귀고...
휴학을 또 했다. 아마 내 인생은 세상의 기준과는 동떨어져 있을 것이다. 겉으로는 기준에 맞춰 그 이상의 것을 가진 것처럼 보이려 애쓴다. 졸업이 또 미뤄졌다. 공모전이라도 나가보라는 친구의 말과 가족의 보챔은 어디에도 없고 그저 내 마음 깊은 곳의 불안감만이 도전을 종용한다. 새로운 일을 시도한다는 건 내겐 너무도 어려운 일이지만 마냥 생각해보면 지금껏 ...
1. 슬로바키아의 남서쪽 그 가장 맞닿은 곳에 조그만 마을 하나가 있다. 푸른 초원이 드넓게 펼쳐진 땅 위에 낡은 울타리로 둘러싼 양 다섯 마리 염소 한 마리를 키우는 오래된 벽돌 집이 보이고, 치매걸린 노부부 혹은 일찍이 과부가 된 여인이 산다. 시골 마을의 흙길을 따라 쭉 걸어가다보면 돌탑 두 개가 양쪽으로 놓여진 '끝'을 볼 수 있는데, 그 입구가 바...
그토록 열렬히 생의 한부분을 찾아 헤매었으나¹ 별의 고향까지 가보지도 못한 채 우리 모두 땡볕을 걷잖아요 우린 모두 여름날의 신기루에 불과한 홀씨일 뿐인걸요내리쬐는 햇빛 사이로 누군가는 쓰러지고 또 누군가는 그림자를 만들어요 무더운 여름날 희망도 불타서 사라져버린 팔월의 열대야는 곤히 자던 갓난아기도 일으켜 세울 테죠 그래도 이 계절이 좋다던 우리말고 당신...
1. 세 살때였나 저 담쟁이넝쿨 바이러스처럼 퍼져가던 오싹한 절벽으로 그만 정수리를 상납한 것이 꼴꼴꼴 쏟아지던 양분 같은 울음을 누군가 대신하여 뿌리째 삼켜버린 것이 그토록 게걸스럽게 먹어치운 것이 나였던가 넝쿨이었던가 그것도 아니라면 남의 집 담벼락이었던가 2. 밥 대신 먹어치운 환멸이 재떨이에 수북히 쌓여갈 때 아 이제 어른이 되었구나 병신과 머저리 ...
혐오스러운 삶이었다다닥다닥 붙은 빨간 창살에 갇혀 몇 년이고 울다가손짓 한번에 흔적도 없이 사라지는 허무한 인생이었다쓰레기통에 쳐박혀 다음엔 어느 감옥이 나를 기다릴까 골똘히 생각하고이제는 추모의 마음으로 글을 쓴다남들은 내 문장이 내 시가 내 인생이 축약과 비약이라고 말하지만 실은 아니란 걸 안다또 어떤 이는 감명을 받았다고 한다그럼 이리 와서 술이나 한...
무언가 깨부수는 소리가 났다 언젠가는제대로 굴러갈 것만 같았던 굴렁쇠가 데굴 데굴, 아니라드르럭 드르럭, 아스팔트를 할퀴고 있다 이제는소녀가 자라 어른이 되었다 그녀가 되었다굴렁쇠를 질질 끄는 슬픈 여인이 되었다 드르륵 드르륵 드르르르륵,졸려도 자지 못하는 몸으로 네모나게 굴러간다 저 너머우리는 우리가 되지 못한 게 아니라 너와 내가 될 수 없는 사람들인거...
말하지 않아도 없는 것은 아니다나무들 사이에 풀이 있듯숲 사이에 오솔길이 있듯중요한 것은 삶이었다죽음이 아니었다중요한 것은 그 거꾸로도 참이었다는 것이다원론과 원론 사이에서야구방망이질 핑퐁질을 해대면서중요한 것은 죽음도 삶도 아니었다중요한 것은 삶 뒤에 또 삶이 있다는 것이었다죽음 뒤에 또 죽음이 있다는 것이었다
마녀는 점만 빼면 미녀가 된다던 15세기 전 고대인의 말씀 그 죽어간 자의 망언을 자랑스레 기록한 벽 앞에 서 있다 그러나 이제는 달군 쇳덩어리만이 인사 대신 높임말을 받기 시작할 때 그리하여 이제는 뛰어내려야할 때계절은 돌고 도는 팽이인가 영영 멈추지 않는 토템인가 아마 무관한 시야를 붙들어매는 환호성이었을 것이다 중동의 개미들은 등이 가볍고 지구 반대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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